

0:20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니, 라고 묻던 성희 언니의 침착한 목소리를 당신은 기억한다. 무슨 권리로 내 이야길 사람들에게 하는 거야, 라고 당신이 이를 악물며 물었을 때였다. 이어 대답하던 성희 언니의 차분한 얼굴을 당신은 지난 십년 동안 용서하지 않았다. 나라면 너처럼 숨지 않았을 거야. 그녀는 또박또박 말했다. 나 자신을 지키는 일로 남은 인생을 흘려보내진 않았을 거란 말이야.
(162)

2:50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버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
(167)

4:00
그 여름으로부터 이십여년이 흘렀다. 씨를 말려야 할 빨갱이 연놈들, 그들이 욕설을 뱉으며 당신의 몸에 물을 끼얹던 순간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다.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174)

4:30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나는 몰라
언제나 같은 사람인지, 그때마다 다른 사람인지도 몰라.
어쩌면 한사람씩 오는 게 아닌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 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
(174)

4:50
내 책임이 있는거야, 그렇지?
입술을 악문 채, 눈앞에서 일렁이는 파르스름한 어둠을 향해 당신은 묻는다.
내가 집으로 가라고 했다면, 김밥을 나눠 먹고 일어서면서 그렇게 당부했다면 너는 남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그래서 나에게 오곤 하는 거야?
왜 아직 내가 살아 있는지 물으려고.
예리한 것으로 거푸 그어 붉은 선이 그어진 것 같은 눈으로 당신은 걷는다. 응급실의 불빛을 향해 빠르게 나아간다.
(177)

<책 내용>
화자는 5.18 당시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 수습을 함께 했던 올해로 만43세인 '임선주(당신)'다.
<소년이 온다> 5장 '밤의 눈동자' 는 저녁 17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의 임선주의 동선을 따라간다.
'당신(화자)'은 5.18당시의 증언을 요청한 사람이 보내온 휴대용 녹음기를 앞에 놓고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신은 녹음기에 테이프를 끼워넣었지만 정작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당신은 밤늦게 사무실을 나와 성희언니가 있는 병원으로 향한다.
당신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두가지 일은 녹음을 하는 것과 성희 언니를 만나는 것이다.
병원에 가서도 성희언니를 찾아가지 못하고 서성이다 새벽이 되어 다시 돌아 나온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을 찾아오는 '혼'들과 마주칠 용기를 얻는다.
당신은 고개를 들고 다시 선주언니가 있는 병원을 향해 빠르게 걸어간다.

<책을 읽고 나서>
<소년이 온다> 5장 '밤의 눈동자'에서도 김진수와 그와 함께 살아남은 사람처럼 당신(임선주)의 삶도 영혼도 다 망가졌다.
내가 만약 '당신'이라면 하고 생각해본다.
누가 내게 녹음기를 들이밀며 '그날들'에 대해 증언을 해달라고 한다면 나도 당연히 당신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럴 것 같다.
'스스로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보통의 사람에게 국가는 용서받지 못할 폭력을 가했다.
그들이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데
그들의 상처자국에 오염의 딱지를 붙이고 바라보기까지 한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피하지는 않았었나.
내가, 바로 내가 그러지는 않았었나.
'그때' 살아남은 자(임선주)가 죽은 자(동호)에게 물은 것처럼
이제 그때 를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과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 때 살아남은 사람에게, 그 때 죽은 자들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내 책임이 있는 거야, 그렇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