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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희랍어 시간> 한강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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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ntent48591 2025. 9. 27.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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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장편소설  <희랍어 시간> 문학동네

한강 장편소설 <희랍어시간> 문학동네

 

<책 속으로>

 

1.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일본계 혼혈인 비서였던 아름답고 젊은 마리아 고타마에게. 그녀는 87세의 보르헤스와 결혼해 마지막 석 달을 함께 지냈다.

(7)

(<희랍어 시간> 첫 문장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칼'이 무엇일까를 계속 생각했다.)

 

2.침묵

그것이 다시 왔어.

 

그것에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었다.

(12)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이었다.

(14)

(나에게는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문장'들이 있다. 그 문장들에 밑줄을 치기도 하고 타이핑을 하기도  하고 그냥 묻히는 것이 싫은 문장들이 있다.)

 

그녀의 삶이 격렬하게 양분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일기장 뒤에 적어가던 단어들은 스스로 꿈틀거리며 낯선 문장을 만들었다.

(15)

 

이십 년 만에 다시 온 침묵은 예전처럼 따스하지도, 농밀하지도 밝지도 않다.

 

모든 언어가 낱낱이 들리고 읽히는데, 입술을 열어 소리를 낼 수 없다.

(19)

 

 

5.

나를 용서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다면, 내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겠습니까.

(37)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44)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귀신에 홀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것을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깨닫고 있었습니다.

(45)

 

어리석음이 그 시절을 파괴하며 자신 역시 파괴되었으므로, 이제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정말 함께 살게 되었다면, 내 눈이 멀게 된 뒤 당신의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가 서서히 썰물처럼 밀려가 사라지는 동안, 우리의 침묵 역시 서서히 온전해졌을 겁니다.

(48)

 

 

7.

오래 전에 끓어올랐던 증로는 끓어오른 채 그 자리에 멈춰 있고, 오래전에 부풀어올랐던 고통은 부풀어 오른 채 더이상 수포가 터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물지 않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62)

 

그녀는 다만 바라본다.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어떤 것도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다.

(67)

 

 

8.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69)

 

세계는 환이고 산다는 건 꿈꾸는 것이다. 라고 그때 문득 중얼거려보았다.

그러나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다.

(71)

 

 

9.

가끔 생각해.

혈육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

(80)

 

내가, 눈이 완전히 먼다 해도 지혜를 얻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너는 알지. 마음의 눈 따위가 결코 떠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혼란스러운 수많은 기억들, 예민한 감정들 속에서 길을 잃고 말 거라는 걸. 타고난 그 어림석음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다만 끈질기게.

(83)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오직 상상 속에서 얇은 점퍼를 걸쳐입고, 문 밖으로 걸어나갈 테니까. 캄캄한 보도블록들을 한 발 한 발 디디며 나아갈 테니까. 어둠의 피륙이 낱낱의 파르스름한 실이 되어 내 몸을, 이 도시를 휘감는 광경을 볼 테니까. 안경을 닦아 쓰고, 두 눈을 부릅뜨고 그 짧은 파란 빛에 얼굴을 담글 테니까. 믿을 수 있겠니. 그 생각만으로 나는 가슴이 떨려.

(84)

(내가~~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그 짧은 파란빛에~~가슴이 떨려~~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붙잡고 있었던 문장들!)

 

 

11.

버스에 오른 순간, 지나치게 강한 에어컨 바람에 그녀는 놀란다. 침침한 조명이 밝혀진 버스 안에는, 십수 명의 승객들이 침묵하며 좌석에 앉아 있다. 피로와 패배감, 오래되고 희미한 적의 같은 것이 배어 있는 침묵이다.

(98)

 

어떤 맥락도 없이. 어떤 전체적인 조망도 의미도 없이.

(100)

 

 

14.얼굴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 쉽게 말해서, 0 이하의 세계에는 이데아가 없는 거야. 아무리 미약해도 좋으니 빛이 필요해. 미약한 빛이라도 없으면 이데아도 없는 거야. 정말 모르겠어? 가장 미약한 아름다움, 가장 미약한 숭고함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플러스의 빛이 있어야 하는 거야. 죽음과 소멸의 이데아라니! 너는 지금 동그란 삼각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119)

 

그 새벽에 왜 나는 너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지 못했을까. 왜 너처럼 용기를 내서, 대법하게 상처를 감수하며 되물을 수 없었을까. 나의 조건이 그렇다면 너의 조건은, 바로 너의 조건은 너이 생각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느냐고.

(120)

 

우리가 가장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121)

 

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그러니까, 너에게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였지.

햇빛이 끓어 넘치는 트램 정류장이었지.

세차게 뛰는 심장.

부풀어오르는 허파.

아직 따뜻한 입술.

그 입술을 누군가의 입술에 세차게 문지르는 거였지.

(123)

 

 

17.어둠

 방금 새가 건물 안으로 날아들어왔다. 어린애의 주먹보다 작은 박새다.

(128)

 

 

19. 어둠 속의 대화

어머니의 검은 입술을 물수건으로 축이며, 자신의 마른 입에 생수병을 기울이며 그녀는 계속 속삭였다. 더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더 빠르게 속삭였다. 마침내 그녀가 침묵했을 때 그 일은 일어났다. 새 같은 무엇인가가 문득 육체를 떠났고, 그 육체는 더이상 어머니가 아니었다. 엄마, 어디로 갔어. 눈꺼풀을 감겨드릴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녀는 멍하게 입속으로 물었다.

(145)

(지금껏 내가 읽은 한강의 소설 속에는 늘 '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자신이 말을 잃은 것이 어떤 특정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165)

  

 

 

20.흑점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174)

 

캄캄한

 

칼집

 

속에

 

빛나는

 

칼,

 

오래

 

숨을 참으며

 

기다리는,

(179)

 

 

0

마침내 첫 음절을 발음하는 순간, 힘주어 눈을 감았다 뜬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져 있을 것을 각오하듯이.

(191)

 

<책의 내용>

한강작가의 <희랍어 시간>은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다.

 

여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침묵에 빠진 다. 다시 언어를 되찾기 위한 실낱같은 희망으로 고대어인 '희랍어' 강의를 신청한다.

여자는 열일곱 살에 한 차례 말을 잃은 적이 있으며, 이번이 두 번째 침묵이다.

이혼, 어머니의 죽음, 아홉 살 난 딸의 양육권 상실 등으로 삶의 균열을 겪으며 그녀는 더욱 고립된다.

 

희랍어 강의를 하는 강사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삽십대 중반의 남자다.

그는 열다섯에 독일로 떠나 그곳에서 17년을 살았고, 열일곱 살에 의사로부터 유전으로 인해 마흔이 넘으면 시각을 잃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는 청력을 잃은 병원집 딸을 사랑했지만 그녀에게 말을 해보라는 말을 했다가 심하게 거절을 당한 기억과

친구 요아힘 그룬델의 죽음이 여전히 아물지 않은 깊은 상처로 남아있다.

 

어느날,

길을 잃은 새 한마리가 희랍어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오면서 그 새를 구해 주려던 남자는 계단에서 넘어져 안경이 부러지고 손에 상처를 입는다. 그 광경을 본 여자가 남자를 일으켜 세우고 부축해 그의 집에 함께 가게 되면서 두 사람의 고요한 삶이 교차하기 시작한다.

이튿날, 다시 그를 찾아온 여자와 남자는 긴 입맞춤을 한다.

 

여자는 마침내 침묵을 뜷고 첫음절을 내뱉는다.

 

 

<책을 다 읽은 후>

<희랍어 시간>은 말과 시각을 잃은 상태에서도 고립과 침묵 속에서도 가능한 소통을 탐색하는 듯 하다.

'언어'가 지나치게 선명하게 다가와 그것이 무서워졌던 여자, 언어에 너무 천착한 나머지 그 무게에 짓눌려 결국 침묵하고.

점점 시력을 잃어가면서 기억과 말에 의존해야 하는 남자는 자신의 상처와 그리움을 언어로 풀어낸다.

마침내 빌딩의 어두운 곳으로 날아들어온 새 한마리가 이 둘의 삶을 교차시키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여자와 남자의 만남으로 말과 시각을 잃어도, 존재는 연결되고 소통할 수 있음을 보려주는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남는 의문들

그들 앞에 놓여진 '칼'은 무엇이었을까

'칼'은 서로의 상처를 드러낸 채 마주하는 고통이었을까.

아니면  깊은 침묵을 깨뜨리는 도구였을까

0장에서 여자가 온힘을 다해 내뱉으려는 첫음절은 무엇이었을까

미약할지라도 빛을 찾아서

0이하의 세계에서 0의 세계를 뚫고 나오려는 여자의 첫 말은?

 

한강 작가의 책은 두 번은 아니 그 이상 읽어야 그 줄거리나마 겨우 따라잡을 수 있다.

<희랍어 시간>도 여지없이 그렇고 어쩌면 다른 책들보다 의미 파악이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하다.

천천히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문장들을 읽으면서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하게 된다.

눈송이 처럼 스스르 사라질 질문들을.

결국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한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멈춰있다.

 

사진들은 2024년 10월 제주 상효원에서 찍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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