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속으로>
문명 1
이야기되지 않는 모든 것은 잊힌다.
(14)
피타고라스가 어떤 인간이 한 말이라면서 들려줬던 명언이 생각난다. <누가 너를 괴롭히거든 복수에 마음을 쓰지 말고 강가에 나가 기다려라. 그러면 그의 시체가 떠내려오는 것이 보일 것이다.>
(245)
문명 2
인간 세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뛰어난 지능과 엄청난 어리석음이 공존한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능력은 때때로 득이 아니라 독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29)
삶은 골칫거리들이 줄줄이 엮인 시간의 흐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불행은 강장제 같아서, 존재에 활력을 불어넣고 우리를 진화하게 만든다. 고통은 감각을 벼리고 감춰져 있던 우리의 능력을 드러내 준다.
평온하기만 한 삶을 살다 보면 정체되고 말 것이다. 적이 나타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가진 용기의 넒이와 깊이를 헤아리게 된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쉽고 편하기만 한 관계는 신비감과 흥분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106)
나는 냉혹한 인간 세계의 법칙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폭력이 평화를 이긴다는 사실. 현실의 복잡성을 의식해 결정을 미루다 보면 결국은 단순 명료한 힘의 법칙을 따르는 야만적인 자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117)
<고양이는 죽을 때 몸을 숨겨요. 안타깝게 고통을 드러내는 개들과는 다르죠. 우리 고양이들은 마지막 임종의 순간을 혼자 조용히 맞고 싶어 해요. 남에게 보이기 싫은 거죠. 자존심 때문이에요.>
(123)
예전에 우리 엄마는 <이 세상에 네 자리가 없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네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란다>라고 말해 주셨어.
(131)
태어나는 순간 미래는 이미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삶의 우여곡절은 첫 숨을 토해 내기 전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는 길을 우리에게 가리키는 표지판일 뿐이라고.
(161)
만약 미래가 쥐들의 것이라면? 쥐들은 오로지 위계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냉혹한 세계를 구축할 거야. 약자를 제거하고 강자는 공포 정치를 펼치겠지.
그동안 내가 그려 온 이상적인 미래는 아니지만 쥐들의 지배는 이미 현실이 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뛰어난 지략가의 지휘를 받으며 철저한 위계질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대군을 어느 누가 막을 수 있단 말인가.
(170)
<불행의 원인은 두 가지란다. 권태감과 질투심. 권태감은 위험이 따르는 행동에 나서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어. 하지만 질투심은 포기하는 것밖에는 다른 약이 없단다.>
(188)
<이왕 물방울일 바에는 잔을 넘치게 하는 마지막 한방울이 되렴.>
(194)
갑자기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남들이 너한테 하는 비난을 자세히 들어보면 그들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단다.>
엄마 말대로 변태들이 도덕을 운운하고, 겁쟁이들이 비겁함을 지적하며, 거짓말쟁이들이 진정성을 추앙하지.
우리는 그야말로 역설이 판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207)
<글을 쓴다는 건 세상 어떤 것보다도 큰 권력이란다. 그 어떤 강렬한 쾌감도 승리의 환호도 글쓰기에 비견할 바가 못돼. 글로 흔적을 남기다는 건 자기 생각이 경계를 뛰어넘어 불명성을 획득하게 만든다는 의미니까.>
(236)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글쓰기는 꼭 필요하단다. 그걸 명심해. 글을 쓰는 순간 네 생각이 정리되고 흐름이 생기면서 단단해지는 걸 느낄 거야. 글쓰기는 네 정신에서 약한 것은 내보내고 옹골찬 것만 남겨 주어 네가 가진 진정한 힘이 뭔지 깨닫게 해 줄 거야. 네게 닥치는 불행을 숙성시켜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줄 거야. 글쓰기는 그 어떤 깊은 대화나 성찰보다도 너를 더 멀리 도약하게 해 주지. 글을 쓰는 동안 잊고 있었거나 일부러 감추고 있었던 네 내면의 지층들을 탐색하게 될 거야. 그러면서 그동안 자기 성찰이 너 자신에 대한 표면적 이해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될 거야. 글로 쓰지 않는 한 네 생각은 모호하고 불완전한 채로 사라져 버리고 말 거야. 명심해. 너는 그 가치도 모른 채 그저 사소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거니 생각할 거야. 하지만 네 감정이 문장이라는 형태를 갖추는 순간 그때 비로소 너라는 존재는 예민한 수신자이자 강력한 발신자가 되는 거야.>
(237)
<무언가를 진정으로 바라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주게 돼 있단다. 내가 도와주마.>
(238)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쥐들이 우글거린다. 갈색 카펫이 일렁일렁 움직이는 것만 같다.
목적지에 도착하는 순간 여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곳은 우리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마지막 희망호 승객들을 버티게 했던 기대가 일순간에 실망감으로 변한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쥐들을 발견한 순간 나는 새롭고 신기한 경험을 한다.
눈앞이 부예지면서 눈가에 액체가 고이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다.
정반대의 두 가지 강렬한 감정이 만나서 일으키는 새로운 현상.
나는 울지 못해 웃는다.
(343)
<책을 읽고 난 후>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장편소설 [문명]은 인류문명이 거의 몰락한 지구에서 고양이 바스테트가 인류를 대신하는 새로운 문명을 만들려는 시도를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파리 몽마르트르에 평온하게 살고 있었던 고양이 바스테트는 파리가 전염병과 쥐 떼의 습격으로 무정부 상태에 빠지자 인간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숨어지내는 동안, 제3의 눈을 가진 고양이 피타고라스와 함께 그들이 함께 생존해 나갈 수 있는 전략을 세운다.
고양이 바스테트는 인간의 기술을 배워 고양이가 세상을 정복하는 새로운 문명을 만들려고 계획중이며 이 과정에서 인간의 기술로 제3의 눈을 얻고 인간의 거대한 지식을 습득하면서 티무르를 우두머리로 한 쥐 무리의 습격에 맞서기 위해서 그를 사육했던 인간은 물론 개 돼지 앵무새 등 다른 동물들과도 연합전선을 펼치며 쥐떼의 공격을 막아낸다.
파리를 점령해가는 쥐떼들을 피해 바다 건너 더 안전한 섬으로 이동하지만 망원경으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쥐들을 발견한 순간 그곳이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라고 깨닫는다. 마지막 희망호의 승객들은 일순간에 실망을 하고 그 앞에서 고양이 바스테트는 눈에 눈물이 고이고 목이 간질거리면서 차마 울지 못해 웃고 만다.
인간의 문명을 대신해 고양이 왕국을 꿈꿨던 고양이 바스테트의 절절한 희망이 꺾이는 순간, 함께 살아남으려고 같이 안전한 곳을 찾았던 다른 종들 모두 결국 세상을 점령한 우글거리는 쥐떼들을 보고 절망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이 소름 끼치게 다가온다.
결국 [문명]은 인간의 문명도 지고, 고양이의 문명도 꽃피우지 못한 채 쥐떼들에게 장악되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영하 10도 부근에서 지탱하고 있는 1월 한 겨울의 날씨. 나는 이불 속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잠이 들었다. 고양이 바스테트의 맹랑함에 끌려 나도 모르게 잠이 와 눈을 껌뻑거리는 순간까지 책을 놓지 않고 읽었다. 책을 읽으면서 이야기에 나오는 고양이 바스테트가 들은 음악들을 함께 들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주인공이 그 장면에서 그 음악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를 상상했다.
쥐 떼들에게 점령당할 문명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다양한 종과의 화합과 협동 공존을 꿈꾸지만 그 무엇도 쓸모없게 만드는 냉혹한 힘! 그것이 바로 오로지 위계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쥐떼의 습격이 아닐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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